Thứ Hai, 13 tháng 5, 2019

[여의도변호사박영진] 사회주의적 결혼, 자본주의적 결혼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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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변호사박영진] 사회주의적 결혼, 자본주의적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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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2. 18. 6:30

이웃추가




최근 저에게 한 언론에서 결혼정보업체에 대한 내용으로 인터뷰를 하자고 제의한 적이 있습니다. 그 언론에선 결혼정보업체들 관련한 보도기사를 내려고 하는데 이혼소송을 자주하는 변호사가 결혼정보업체에 대해 한 마디하는 인터뷰 내용이 필요했습니다.

인터뷰를 하려는 측에서는 요새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사랑도 없이 그저 서로 상대방의 조건만 보고 결혼하기 때문에 문제가 많지 않냐, 이렇게 결혼한 부부들이 결국 대부분 좋은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고 이혼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이혼사건을 많이 처리하는 변호사로서 이런 결혼정보업체를 통한 결혼의 상당수는 결국 파탄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대답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답은 자신들이 정해놓고서 저에게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대본을 읽는 식의 인터뷰를 시도한 것입니다.

결혼정보업체의 문제점이야 당연히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결혼한 커플들이 그렇지 않은 커플, 특히 긴 기간 연애 끝에 ‘사랑으로’ 결혼한 커플보다 이혼을 많이 한다는 것은 저의 변호사로서의 업무경험과는 다르기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어떠한 통계 자료를 가지고 그렇게 단정지어서 이야기하냐고 물어보니 상대는 어이없어 했습니다. 그런 것은 통계 자료 따위가 없어도 당연히 알 수 있는데 그런걸 왜 물어보냐며 저를 한심하게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도 없이 그저 결혼정보업체가 서로의 조건에 맞게 소개해 준 상대방의 직업, 경제력, 집안, 학벌 같은 조건만 보고 결혼한 통속적인 사람들이 제대로 결혼생활을 할 리가 없으니 결국 서로 싸우고 이혼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제대로 된 조사자료도 없이 자신들 멋대로 추측한 다음 미리 답을 정해놓고 변호사에게 자신들이 만든 답을 외워서 대답하라는 인터뷰에는 응할 수 없기에 거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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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정보업체 듀오가 조사한 이상적 배우자의 조건 (출처 : 연합뉴스)


많은 사람들이 결혼정보업체를 통한 결혼에 대해 갖는 생각이 이런 것입니다. 서로를 좋아하는 순수한 마음 없이 그저 서로가 원하는 조건에 맞는 상대방을 결혼정보업체에 돈을 주고 찾은 다음에 만나서, 조건이 맞으니 대충 결혼하는 이런 식의 결혼은 남녀가 순수하게 만나서 순수하게 사랑하고, 서로의 조건 같은 것은 상관없이 열정과 사랑의 마음만을 가지고 순수하게 결혼하는 '진짜 결혼'에 비해 성공적인 결혼이 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순수한 결혼'을 한 사람들은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결혼을 한 사람들에 대해 일종의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결혼은 순수한 '진짜 결혼'이고, 결혼정보업체를 통한 결혼은 그저 '천박한 짝짓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던 언론사 사람의 생각대로 자유연애 끝에 사랑으로 결혼한 '진짜 결혼'을 한 사람들은 결혼생활의 만족도가 더 높고 이혼도 잘 안해야 하고, 반대로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천박한 짝짓기'를 한 사람들은 허상뿐인 결혼생활을 하니 불행하게 되고 결국 이혼에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혼이라는 일종의 산업화된 비즈니스에서 이혼하는 당사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변호사로서 일하며 느낀 바로는 오히려 혼인 파탄에 더 취약한 부류는 바로 순수한 사랑의 '진짜 결혼'을 한 부부들이었습니다.  조건을 따지며 결혼을 한 '천박한 짝짓기'가 오히려 결혼생활의 만족도가 더 높고 이혼에 이르는 경우가 더 적을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이혼변호사로서의 경험에서 얻은 결론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형태의 이혼을 대리인으로서 함께 하다 보니 일반 사람들의 상식과는 다른 이런 결과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본주의의 논리로 모든 것이 돌아가기에, 자본주의의 논리에 어긋나는 행동은 언젠가는 결국 탈이 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혼과 이혼이라는 제도 역시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의 제도일 수 밖에 없습니다. 결혼과 이혼은 철학이나 법학의 영역이라기보다 실제로는 경영학과 경제학의 영역에 속합니다.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사회주의적인 결혼을 했다면 힘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끝내는 이혼이란 제도의 속성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입니다.



사회주의 경제학과 자본주의 경제학의 가장 큰 차이를 꼽으라면 ‘가치’에 중점을 두느냐, 아니면 ‘가격’에 중점을 두느냐 일 것입니다.

사회주의는 ‘가치’에 중점을 두는 제도입니다. 특히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주장한 노동가치론에 기반해서 오로지 인간의 노동만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고 이윤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가치에 대한 이론은 투입된 원래 자본의 가치보다 가치가 늘어난 잉여가치는 오로지 노동에 의해서만 나올 수 있는데 자본가가 이를 가져가기 때문에 결국 노동자는 착취 당할 수 밖에 없다는 잉여가치설로 이어지게 됩니다. 사회주의 경제학에서 말하는 ‘가치’란 고도의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단순히 재화에 붙여진 가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치’로 세상원리를 설명하는 사회주의 경제학에 비해 자본주의 경제학에서는 모든 것을 ‘가격’으로 설명합니다. 가격은 시장에서 파는 모든 물건에 붙은 그 가격을 의미합니다. 물건에 대한 가격은 수요가 많아지거나 공급이 적어지면 올라가고, 수요가 적어지거나 공급이 많아지면 가격이 떨어집니다. 세상 만물에는 다 가격이 붙어있고 돈에도 이자라는 가격이 붙어있습니다.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에서 가격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앞으로 가격이 어떻게 될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전혀 다릅니다. 내 손에 오렌지주스 한 병이 있다면 사회주의적 시각으로는 그 오렌지주스는 태초의 자연상태에서라면 들판의 나무에 아무렇게나 달려있어 아무런 가치가 들어있지 않은 오렌지를 누군가의 노동을 들여서 따고, 그것을 다시 저장하고, 힘을 가해 즙을 짜내고, 병을 만들고, 병에 담고 하는 등의 ‘노동’을 들였기에 가치가 있는 물건이 된 것입니다. 즉, 오로지 인간의 노동으로 들판의 오렌지가 오렌지주스라는 새로운 가치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오렌지주스에는 들판의 오렌지에서 병에 담긴 오렌지주스가 되기까지 들어간 인간의 ‘노동량’이라는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오렌지주스를 파는 자본가는 노동을 투입한 자도 아니면서 노동자들이 창출해낸 잉여가치를 착취해갑니다. 자본가가 착취해가는 잉여가치를 노동자에게 돌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혁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혁명 이후에는 다들 잘 알다시피 가격에 의해 시장에서 물건이 팔리는 그런 경제체제가 아닌 계획경제에 의해 필요한 자들에게 배급을 주는 체제로 가게 됩니다.

자본주의 경제학에서는 오렌지주스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는 관심사가 아닙니다. 오로지 수요와 공급에 의한 ‘가격’, 그리고 상품을 사는 사람이 얻는 즐거움의 증가분인 ‘한계효용’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수요와 공급이 어떤 요인으로 인해 변하는지가 관심의 대상입니다. 오렌지 산지가 자연재해를 입으면 공급이 줄어드니 가격이 올라가고, 오렌지주스의 대체재가 인기를 끌면 수요가 줄어드니 가격이 떨어집니다. 같은 오렌지주스라고 해도 다양한 차별화를 통해 가격을 올려도 수요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오렌지주스 한 병이 지닌 ‘가치’라는 극도로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평가개념은 전혀 고려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숫자로 바로 나타날 수 있는 가격과 판매량, 매출액 등이 중요합니다. 상품의 가치란 것은 사회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상품 자체가 지닌 근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가치가 아니라 그 상품을 사는 사람이 상품을 얻게 됨에 따라 느끼는 행복의 증가인 ‘한계효용’에 따라 결정됩니다.



제가 말하는 사회주의적 결혼이란 것은 바로 현실적이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가격’ 보다는 형이상학적인 ‘가치’에 중점을 둔 결혼입니다. 그리고 남녀의 만남과 결혼 그 자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적인 결혼입니다. 반면에 자본주의적인 결혼이란 것은 ‘가격’과 ‘한계효용’에 충실한 결혼입니다.

사회주의 경제학에서의 ‘가치’가 형이상학적이고 고도로 관념화된 체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듯이 사회주의적 결혼에서의 ‘가치’ 역시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이며 다른 것들과 쉽게 비교할 수 있는 척도도 없습니다. 그런 ‘가치’를 예를 들자면, 바로 연인간의 사랑, 연인이 나만을 바라보는 헌신, 서로의 사랑은 변함없을 것이라는 다짐과 약속 등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서로 공유하는 가운데 한 결혼은 그 자체로 새로운 ‘잉여가치’를 창출하게 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본주의적 결혼에서의 ‘가격’이란 지극히 속물적입니다. 상대방의 직업, 경제적 능력, 상대방 부모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 학벌 등이 바로 자본주의 경제학에서 ‘가격’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런 가격을 지닌 상대방과 결혼했을 때 내가 이전보다 더 즐겁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행복의 증가분이 바로 ‘한계효용’입니다.




제가 이혼변호사로서 담당한 수많은 이혼소송에서 당사자들은 대부분 결혼할 때 서로의 사랑을 믿고, 상대방의 헌신을 믿고, 앞으로 결혼에서도 이러한 사랑과 헌신이 계속되리라는 믿음을 지닌 채로 결혼했습니다. 즉, 결혼의 사회주의적 가치를 믿고 결혼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그러한 가치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가 계속 변함없이 유지될 수도 없습니다.

어린 나이에 만나 오랜기간 연애를 하며 ‘순수한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한 커플일 수록 결혼생활에서 자신들이 소중하게 생각한 가치가 깨지면서 결국 혼인이 파탄에 이르는 경우를 저는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그런 당사자들은 저에게 상담을 와서 어떻게 상대방이 자신에게 그런 짓들을 할 수 있는지 치가 떨린다며 분노합니다. 자신은 상대를 위해 인생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고 헌신하였고 심지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느라 부모님과도 등을 돌리게 되었는데 상대방은 그런 자신의 신뢰와 사랑을 철저하게 배신했다는 것입니다.

연인간의 사랑과 헌신이라는 궁극적인 가치를 믿으며 서로 연애를 했고 결혼을 할 때는 서로의 사랑과 헌신이 끝까지 갈 것이라 믿었지만 그런 가치가 계속 유지되기에는 결혼은 너무나 현실적이고 속물적입니다.

여자의 경우 남자가 연애때 여자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 자신의 다른 생활을 포기해가며 여자에게 달려가는 것을 보고 이 남자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나를 위해 평생을 헌신해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헌신과 사랑의 가치를 높이 사서 결혼합니다.

그러나 결혼해서보면 이 남자는 자신의 일을 빈둥거리며 열심히 하지 않기에 직장생활에서 도태되는 유형입니다. 결국 이 남자는 직장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나와서 제대로 된 직장을 다시 갖지 못한 채 빈둥거리며 여자에 빌붙어서 살아갑니다. 자신의 세계를 제대로 다지지 못한 남자가 가정을 제대로 꾸릴 수는 없는데 결혼 전 아내는 이 남자를 ‘나를 위해 자신의 일도 포기할 수 있는 헌신적인 남자’라고 보아 그 ‘헌신’의 가치를 중요하다고 여겨 결혼했습니다.

결혼 전 남자가 순수하고 착하다고 생각한 면은 사실 이 남자가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것이었습니다.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가장이 아내와 아이들을 제대로 먹여 살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순수하고 착하며 애인에게 헌신하는 남자들의 상당수는 마마보이일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이 남자가 착하고 순수한데다 여자의 말에 무조건 잘 따르는 경향이 있으니 앞으로 결혼생활 동안 오로지 아내만 바라보면서 살 것이라 생각해 결혼했는데, 결혼해보니 이 남자는 오직 엄마 밖에 모르는 사람이며 무슨 일을 해도 엄마에게 물어보는 마마보이였습니다. 마마보이였기에 자신의 엄마에게 하던 짓을 애인에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 마마보이의 모습이 상냥하고 나에게만 헌신하는 만만한 남자인 것 같아 결혼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것입니다.



지금 가진 것은 별로 없지만 앞으로 자신은 꿈을 펼쳐서 큰 꿈을 이루고 성공하겠다는 젊은 남자의 모습은 매력적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이런 꿈에 대해 큰 가치를 부여하고 결혼합니다. 그러나 이런 남자의 상당수는 매일 매일을 성실하게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주변 친구들을 무시하고 비웃으며 자신은 더 큰 일을 할거라며 큰 소리만 쳐대는 그런 작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연애 때는 이런 남자의 모습이 패기있어 보이고 나중에는 그의 말대로 성공을 거둘 것이라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직장에서 성실하게 하루하루 일하는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고 비웃는 이런 작자가 성공할 리가 없습니다. 결혼생활 동안에도 돈은 못 벌어오면서 계속 허황된 꿈에 젖어 큰소리만 쳐대다가 가족들을 고생만 시키는  무능한 가장이 될 것입니다.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애 때 이 여자가 자신의 학교나 직장생활에서의 중요 업무를 포기하면서까지 남자에게 헌신하였다고 그 점을 높이샀다면, 여자의 그런 모습은 결혼 이후에는 남편에 대한 무서운 집착으로 이어져 남편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 자체를 못하게 난리치는 모습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혼전 여자의 쿨하고 자유로운 생각과 행동을 높이 샀다면 이는 결혼후 아내의 자식들에 대한 방치와 무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만약 여자가 세련된 감각으로 순박했던 나를 연애기간 동안 세련되게 바꾸어놓았다고 좋아했는데 결혼하고 나니 아내의 사치와 낭비로 더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남녀간에 서로 느끼는 사랑이라는 최상의 가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연인들은 서로 평생을 사랑할 것이라 맹세하고, 자신들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라는 불변의 가치를 깊이 믿고 결혼합니다. 그러나 결혼 이전에 내가 느꼈던 감정이 진짜 사랑이었는지에 대해 결혼 후 회의감이 들 가능성도 많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대체 사랑이라는 가치가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내리기도 힘듭니다. 특히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는 연인들의 경우, 삶의 경험이 부족하므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또한 사랑이라는 것 역시 결혼 이전에 연인사이에 요구되는 사랑과, 결혼 이후 아이들을 키우며 부부 사이에 요구되는 사랑은 그 내용과 형식 자체가 다릅니다.

결국 속물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조건 따위보다는 더 고귀하고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믿으면서 그러한 가치만을 주로 추구하며 결혼하는 사람들이 바로 사회주의적인 결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가 과연 불변의 가치인지, 젊은 시절의 미천한 인생경험을 통해 느꼈던 가치가 인생에서 계속 그 가치로서의 진가를 유지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한 가치에 대해 내가 전혀 착각하는 바가 없이 100퍼센트 존재하는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그 누구도 쉽게 답을 할 수 없습니다.

사회주의적인 결혼이 실패하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인간이고, 우리가 사는 세계는 자본주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속물성에 대해서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나와 상대방의 속물성을 애써서 사랑이니, 헌신이니, 믿음이니 하는 ‘가치’로 억지로 숨기면서 그런 속물성이 전혀 없는 것처럼 행동하면 결국 낭패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자본주의적 결혼은 철저하게 가격과 한계효용에 충실한 결혼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본주의적 결혼을 노골적으로 비즈니스화한 것이 바로 결혼정보업체 산업입니다.

상대방의 직업, 학벌, 경제력, 집안 등 현실적이고 속물적인 조건은 바로 자본주의 경제학에서의 ‘가격’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런 결혼을 통해 얻는 현실적이고 속물적인 즐거움의 증가는 바로 ‘한계효용’에 해당합니다. 상대방의 직업이 안정적이고 돈많이 버는 직업일 수록, 상대가 좋은 집안의 자식이고 경제력이 좋아 신혼의 시작을 좋은 아파트에서 편안하게 시작할 수 있다면 효용이 증가합니다.

이런 식으로 속물적인 조건을 따지며 결혼하는 커플의 모습은 주변에서 보기에는 참 재수 없고 천박합니다. 진정한 사랑, 상대에 대한 헌신과 믿음, 서로 공유하는 미래에 대한 꿈 같은 형이상학적이고 관념론적이며 휴머니즘적인 가치 공유는 전혀 없어보이는 모습에 다른 사람들은 손가락질 합니다. 그냥 둘은 서로 속물적 조건이 맞으니 일단 결혼한 것입니다. 상대를 ‘사랑한다’라는 생각으로 결혼했다기 보다는 상대의 조건이 ‘나쁘지 않다’라는 생각으로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결혼이야말로 실패할 확률이 적은 가장 안전한 결혼입니다. 일단 서로 실망할 부분인 '가치'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치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으니 결혼 이후 상대의 모습에 대해 크게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헌신하고 희생한 것도 별로 없으니 크게 손해보는 느낌도 없습니다. 그대신 일단 가격과 효용 같은 물질적이고 속물적인 조건이 맞았으니, 이제 정신적 만족의 단계인 가치를 추구할 여유가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서로 상대방에 대해 조금의 가치만 보여준다고 해도 만족도가 크게 올라갑니다. 애초에 큰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사랑, 헌신, 돌봄 같은 사회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가치의 작은 증가분에도 증가하는 만족도로서의 한계효용이 큰 것입니다.   

만약 이런 자본주의적 결혼이 결국 이혼으로 간다고 해도, 사회주의적 결혼에서의 이혼보다는 훨씬 손해보는 것이 적고 인생의 타격도 적게 받습니다. 왜냐하면 혼인파탄의 결과인 이혼은 전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혼소송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아이에 대한 부분인 친권과 양육권, 그리고 금전적인 부분인 재산분할과 위자료입니다. 금전적인 부분인 재산분할과 위자료의 경우 돈으로 환산해서 결정이 나는 것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자본주의적입니다. 부부 공동의 재산을 분할대상재산명세표에 하나씩 나열한 다음에 그 순자산 가액에서 서로간의 재산분할 비율에 따라 나눠가져가게 됩니다. 부부 공동으로 형성한 것이 아닌 재산의 경우 고유재산이라고 하여 분할대상 자체가 안됩니다.

둘 중에 더 착한 사람이 재산분할 비율이 높은 것도 아니고, 더 사랑을 한 사람이, 더 헌신한 사람이 돈을 더 가져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재산형성에 있어서 얼마나 돈을 더 냈는지, 서로 결혼기간 중 소득액의 비율이 어땠는지, 여자가 전업주부라면 결혼생활 기간이 어느 정도인지 등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고려하게 됩니다. ‘가치’가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부부 중 하나가 외도를 하였거나 폭력을 행사한 경우처럼 부부간의 신뢰, 즉 ‘가치’를 져버리는 행동을 했다고 해서 재산분할에 이것이 반영되어 비윤리적인 쪽이 윤리적인 쪽에 비해 재산분할 비율이 나빠지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이런 경우에는 위자료 산정에 있어 참작이 될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혼에 있어서 재산분할을 하려면 일단 부부간에 공동재산으로 형성된 재산 자체가 존재해야 합니다. 사회주의적으로 ‘가치’를 추구하고 자본주의적인 요소들에 대해 무시하며 결혼한 커플이 결혼후에도 계속 가치만을 추구하고 재산을 모아놓지 않았다면 재산분할을 할 것도 없습니다. 나눌 재산이 있어야 하고, 그 재산이 커야만 이혼의 경제적 실익이 존재합니다.

아이들에 대한 친권과 양육권 문제도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가치보다는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가격과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더 좋은 교육환경, 더 좋은 주거환경 등의 효용이 더 중요합니다. 경제력이 없고, 직장도 없고, 아이들을 대신 돌봐줄 보조양육자인 가족도 없는 쪽은 친권과 양육권을 가져오기 힘듭니다. 아이들을 내가 혼자 키워도 나는 좋은 직업과 경제력이 있고, 내 부모의 경제력이 있고, 보조양육자로서의 내 부모가 근처에 살고 있다는 점을 나타내면 친권과 양육권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치로 나타낼 수 있는 ‘가격’과 ‘효용’적인 면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면서 단순히 “내가 아이들을 더 사랑한다.”, “아이들은 내가 키워야 더 잘 자랄 수 있다”, “상대는 비윤리적인 사람이라서 윤리적으로 우위인 내가 키워야 한다.”라는 식으로 ‘가치’만을 주장해봤자 이혼소송에서 제대로 통할 리가 없습니다.

결국 이혼에 있어서는 자본주의적인 결혼을 했던 사람들이 유리합니다. 우리가 선택한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의 이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자본주의적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둘 다 남녀가 함께 이루어나가는 세계이지만 연애의 세계와 결혼의 세계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은 우리 인생의 여러 상황을 바꾸어 놓습니다. 연애 때 느끼는 가치와 결혼해서 느끼는 가치가 같은 것일 수 없습니다.

결혼 전에는 안 그랬는데 결혼 후에는 사람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사람이 크게 바뀐 것이 아니라 연애와 결혼이라는 두 사람이 속한 사회 자체가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지위가 연인에서 부부로 바뀌었습니다. 연애에서의 헌신과 책임감이란 가치와 결혼에서의 헌신과 책임감이란 가치가 같은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부부 사이에 아이를 낳게 되면 아이를 함께 키워나가는 환경 자체가 이제는 새로운 환경입니다. 새로운 환경에서는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사랑과 헌신 같은 두 사람 사이의 가치체계도 새롭게 다시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적인 가격 요소들은 결혼을 했다고 해서 변하지는 않습니다. 숫자로 당장 나타낼 수 없는 관념적인 가치들이 결혼생활이라는 인생의 함수에 있어서 x1, x2, x3 등의 변수라고 한다면,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자본주의적인 가격들은 a1, a2, a3 같은 상수입니다. 변수의 갑작스런 변동에서 오는 충격을 막아서 함수의 결과물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a1, a2의 상수들입니다.

그리고 서로 상수인 가격 조건들을 따져서 결혼한 사람들이 이제 상수인 조건은 서로 만족되었으니 변수인 여러 가치들을 함께 이룩해 나가는데 서로 협력하고 힘쓴다면 실제로 더욱 다양하고 큰 가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질적 조건들이 충족된 연후에야 사람은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할 여력이 생기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속물적이고 천박해 보이기는 하나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서로 자본주의적인 가격 조건과 한계효용을 따져보고 결혼하는 것은 실제로는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본주의적 가격과 효용 요소들을 속물적이고 비인간적이라며 천시하고, 그런 자본주의적인 결혼을 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비난하면서 자신들은 ‘가격’이 아닌 ‘가치’를 추구한다며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고귀하며 윤리적으로도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주의적 사람들이야말로 서로를 속이고 자기 자신도 속이는 위선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리 없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고 결혼을 하면서 자본주의적 가격과 효용이라는 요소를 천박하다고 무시하며 형이상학적이고 관념론적인 가치에만 매달린다면 그 결혼은 순탄하게 지속하기 힘들다는 것이 바로 제가 자본주의적 이혼의 최전선에서 매일 업무하면서 겪고 느낀 점 중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결국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 결혼과 이혼이란 자본주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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