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ủ Nhật, 28 tháng 4, 2019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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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丙寅洋擾 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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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4.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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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평등, 박애를 나타내는 프랑스의 삼색기

파리를 갈 때마다 느끼는 개인적인 감정이지만 이 나라 사람들 참 불친절(unkind,unfriendly)합니다.(대부분 백인들이죠.) 
그들의 생물학적 콧대만큼이나 높은 문화적 자존심(cultural pride) 내지는 동양인에 대한 인종적(racial) 혹은 그들의 제국주의가 절정을 이뤘던 세계근현대사를 통해 몸에 배인(ingrained) 역사적우월감(sense of superiority)이 은연중(unconsciously) 나타나는 게 아닌가 싶은데,
뭐 이 것 역시 제 스스로가 가지는, 열등감(complex)까지는 아닐지라도 서구에 항상 깨지고 밟히고 착취당하면서도 별다른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했었던 근대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의 그 불평등(unfair,unequal)했던 관계에서 느껴지는 짜증스러움 일수도 있겠습니다.

1789년 시민혁명을 통해 절대왕정을 몰아낸 자유와 평등의 아이콘과도 같은 프랑스가 자유, 평등, 박애를 뜻하는 그들의 삼색기를 앞세워 제국주의 시절 타 국가를 무력으로 식민지화(colonization)하고 착취하는 과정에서 미개한 전근대국가들에게 근대화의 축복을 내리고 하느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해 만인을 구원한다는 구실로 행했었던 위선적인(hypocritical) 행위들이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게 지금의 현실이 아닐런지..(실제로 2차대전때 독일에 개발리고 점령당했을 때는 이러는 거 아니라고 징징대던 애들이 종전 후 자국의 식민지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은 너무도 잔인하게 짓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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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드라크르와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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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자행된 프랑스의 아프리카 대륙 착취

대한민국에 있어 프랑스는 광복 이후 현대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이념대립관계에 있어 미국과 함께 자유진영을 대표하는, 본격적인(fullfledged) 냉전시대를 개막한 한국전쟁당시 UN군의 일원으로 군대를 파견했던 우방국들중의 하나입니다.

몇 년 전 프랑스에 있는 조선왕실외규장각 도서의 반환문제를 둘러싸고 영구임대 방식이 아닌 5년 재임대 조건으로 돌려받기로 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우리 걸 돌려달라는데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 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물론 이 것 또한 당시 우리 나라의 KTX사업과 관련 자국의 떼제베를 도입해 달라며 선심쓰듯이 내밀었던 당근이었죠.결국 프랑스의 의도대로 알스톰사와 고속전철 도입 계약을 맺습니다.)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있었던 이 조선시대의 소중한 사료들이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가게 된 사건이 1866년 10월 일어난 조선과 프랑스의 최초이자 마지막 전투인 병인양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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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 사주면 이 거 줄게... 이거 우리꺼 가져간 거 아냐? ... 어 맞어 그거야..

15세기 대항해시대(The age of exploration)부터 시작된 서구열강들의 식민지전략을 보자면 그들의 종교인 천주교의 가르침을 전파한다는 구실로 선교사들을 앞세워 식민지국가에 진입하는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신앙심 충만한, (물론 걔중에는 장사속 충만한 분들도 있으셨겠지만요..)선교사들이 포교한다는 신념하나로 위험을 무릅쓰고 천주교의 불모지인 새로운 국가로 들어가서 선교활동을 벌이면 자국민들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군대를 파견하고 혹시 박해라도 받을라치면 하느님과 왕권을 모욕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무자비한 정복전쟁을 일으켜 식민지로 삼기 일쑤였죠.(하느님이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신성모독죄를 묻는게 말이나 되는 겁니까..)
조선과 프랑스의 첫 만남 역시 중국에서 넘어온 프랑스인 선교사들의 포교활동으로 시작이 되는데 당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불교와 중국에서 넘어온 유교인 성리학 그리고 민간신앙등이 혼재되어 다양한 종교가 어느 정도 인정이 되던 조선의 사회적 분위기속에서 서양의 학문을 배우자는 실학파들을 중심으로 인문학적인 연구차원에서 받아들여졌던 천주교가 당시 계급차별사회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하층민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퍼지게 됩니다.
그러나 양반의 학문인 유교의 신분제와 천주교의 평등사상간의 갈등, 그리고 우상숭배를 금하는 천주교의 교리에 따른 조상을 모시는 제사의 거부등 당시 조선지배계층의 정서와 상충되는 부분이 많았던 천주교는 그 때까지 천주교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던 흥선대원군이(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순목대원비, 장녀 그리고 고종의 유모등이 천주교신자였던 걸로 보아 초기에는 오히려 우호적이었던 걸로 보임.) 당시 청국에서 벌어진 아편전쟁때문에 서구열강에 대한 강한 반감과 위기감을 갖게 되고 또 전국 각지의 유학자들이 천주교는 사교이니 인정하면 안 된다는 갖은 상소를 올리면서 박해를 받기 시작하는데 결국 1866 년 8000여명의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이 목이 잘리는 참극이 벌어집니다.(병인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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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지금의 양화대교 북단인 양화진에서 목이 잘리는 천주교인들.. 이 사건을 계기로 절두산이라고 불림..

병인박해 당시 조선에 들어와 있던 12명의 프랑스 선교사 중 단 3 명만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는데 이 중 한 명인 리델신부가 청나라로 피신하여(took refuge in) 텐진항에 주둔해 있던 프랑스군극동사령부를 찾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의 처형소식을 접한 프랑스군 로즈제독은 '프랑스의 존엄을 건드린 조선국왕에게 이 책임을 추궁하겠노라'는 프랑스 국왕의 교시를 받들어 (물론 실지로는 항상 그래왔듯이 이제 군대를 보내 불평등조약을 맺고 등골을 빼 먹을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겠지요.) 1차로 군함 세 척을 보내 강화해협을 지나 지금의 서강대교 부근까지 진입하여 조선군의 경비상태와 한강수위등을 정찰하고 돌아갑니다.
이로부터 한 달 후인 1866년 10월 14일 로즈제독은 프리깃 함 게리에르를 비롯한 7척의 군함과 일본 요코하마에 주둔중이던 300명의 프랑스군 해전대를 포함한 800명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의 내륙으로 가기 위한 관문인 강화도의 강화성을 공격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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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침입때 서강까지 오게 내버려둔 지방관리들이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되고 2차 침입때 죽어라 싸웁니다.

당시(at that time) 조선과 프랑스 두 나라의 군사력 차이는 뭐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정도였을 것입니다.(not in the same class)
대포의 사거리, 파괴력 그리고 역시 소총의 사거리와 장전속도 등 무기의 질적인 차이뿐만 아니라 여러 해 이어지던 식민지전투에서 실전경험(practical experience)을 쌓은 프랑스의 정예군사들과 실질적인 전투라고는 해 본 적이 없었던 조선군사들의 기량차이 또한 너무 큰 터라 홈그라운드에서 성 쌓고 수비하는 이점말고는 객관적 전력에서 조선이 절대적으로 밀리는 상황이었던 거죠.

첫 번째 벌어진 강화성에서의 교전은 처음 보는 서양의 신무기와 위세에 눌린 조선군의 후퇴로 인해 강화성이 프랑스군의 수중에 넘어가며 끝이 나고
조선의 본토인 김포지역으로 진입할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벌인 두 번째 문수산성전투는 한성근이 이끄는 조선군이 격렬히 저항하며 프랑스군에 경미한 타격을 입히기도 했지만 결국 문수산성일부를 프랑스 군에 빼앗기고 성루와 성곽이 소실되는 등 조선군의 실질적인 패배로 끝이 납니다.
강화 해협의 양쪽 끝인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모두 확보한 프랑스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프랑스군의 후방을 치기로 한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은 당시 호랑이사냥꾼을 일컫는 산척들을 불러모아 관군들과 함께 조성한 500여명의 수비군을 강화도 남쪽에 위치한 정족산성에 배치하고 정족산성을 치러 온 160명의 프랑스육전대를 맞이합니다.(나라가 중차대한 위기에 처한 시기에 민간사냥꾼을 동원해야할 정도의 군사력이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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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분들의 선배분들이 병인양요때 큰 일을 하셨습니다.

1866년 11월 9일 이 전 몇 번의 전투를 통해 조선군을 수준이하의 오합지졸로 여기게 된 프랑스군은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야포조차 챙기지 않은 채 정족산성으로 통하는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며 공성전을 펼치는데 사정거리(distance of fire)가 프랑스군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화승총의 사정거리에 적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린 후 집중사격(massive fire)을 가하는 조선군의 목숨을 건 반격에 막혀 사망 6명 부상 30명의 피해를 내고 결국 강화성으로 물러갑니다.
이 후 벌어진 작은 국지전(a limited war)을 빼면 이 정족산성 전투가 병인양요의 실질적인 마지막 전투가 되죠.

갑곶진까지 밀려가 정신을 차린 로즈제독은 개항을 하지 않겠다는 조선측의 굳은 의지를 지금 자신의 병력으로 꺾고 굴복시키기는 어렵다고 보고 본국과의 협의 끝에 청나라로 회군을 결정합니다. 그 때 당시 조선에 인질로 잡혀있는 줄 알았던 프랑스 선교사 두 명이 청나라로 피신해있다는 사실도 확인했으니 원래 가지고 왔던 명분도 희미해지긴 했을테죠.
약 한 달간 주둔했던 강화성을 떠나면서 강화성 외규장각에 보관중이던 조선의 국가문서, 은괴, 서화 보물들을 모조리 챙기고 남은 문서와 건물들은 모조리 불을 질러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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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에 주둔했던 프랑스군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병인년에 양넘들이 쳐들와서 부린 난동이요 프랑스의 입장에서 보면 1866년 자행한 the brand new 식민지확충정책중 하나인 이 전쟁은 양측의 인명피해가 크지는 않았지만 조선에 있어서는 처음 접하는 서구열강세력의 막무가내식 행패에 대한 두려움과 서양배척에의 의지가 고취되어 더욱 더 국가의 담을 높이 쌓게 되는 계기가 되는 의미있는 역사적사건입니다.
결과론적으로(looking at the results) 우리가 개일본제국의 식민지배를 겪었기에 여타 제국주의(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미국 등)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유독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게 사실입니다만 이 당시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행했던 침략과 식민지배, 그리고 여러 서구세력의 아시아, 아프리카대륙에 대한 침탈행위를 생각한다면 19세기 세계를 휩쓸었던 제국주의의 광견( mad dogs)들 중 그 어느 나라가 조선을 점령했더라도 참혹한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빨라지는 속도와 기술의 발전만큼이나 역사의 쳇바퀴 또한 빨리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정신차려야 할 때입니다.

Link Source : http://m.blog.naver.com/roylee7/220779507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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